Jeju Olleh: Myung-Sook Seo at TEDxSeoul

By | August 26, 2019


번역: TED Translators admin
검토: Sunduk Wang (박수) 안녕하세요. 이렇게, 뜨겁게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그런데 환영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요. 왜? 강연만 무료로 하는게 아니라 제 돈으로 왕복 비행기표, 제가 내고. (박수) 제가 제주에 살기 때문에,
이 무료특강을 위해서 비행기를 안 탈 수가 없었죠.
오늘 왔어요. 저는 아까 사회자가 설명 했듯이,
고향 제주도에서 길을 내고 있는, 취미로 걷기 시작했다가 급기야 생전
해보지도 않은 길내는 일에 종사하는, 저희 어머니의 표현에 따르면
‘미친년’입니다. (웃음) 저희 어머니는 제가 직장 그만둘때도
미친년이라고 한 번 하셨고, 50 다 된 여자가 산티아고를
배낭매고 가겠다니까 “일본이나 태국가서 마사지나 받고오던지
온천이나 갔다오던지 미친년이 따로없다. 그러더니 급기야 마지막에 다녀와서는
제주도에 다시 돌아가서,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데, 기껏 와서 서울에서 자리잡았는데,
다시 고향에 가서, 그것도 길을 낸다고 그러니까,
“너 하는 일을 어떻게 주위사람에게 설명을 하느냐?” 그러면서,
“정말 미쳤다”고 그러셨는데 여러분은 오늘
미친년의 강의를 들으시게 됩니다. (웃음) 그럼 제가 왜 길을 냈는지… (웃음) (박수) 저는 어린 시절에 성산읍, 제주도에서
여러분들 일출봉 아실거예요, 해가 뜨는 성산읍 고성리 쪽에서
태어나서 한 두살때부터는 서귀포, 대한민국의 나폴리라 그러죠.
너무나 아름다운 서귀포에서 어린 시절, 초, 중학교까지 보냈어요.
여러분들이 비행기타고 가서 어쩌다가 한 번 보는 천지연은
제 놀이터였고, 정방폭포는 엄마한테 집단기합을
받을 것 같으면 다니는 그런 데였죠. 그렇지만 그때 서귀포에 살 때는
서귀포가 좋은 줄 몰랐어요. 어려서 자연을 보는 안목도 없었지만,
너무 닫힌 곳에서 사니까, 매일 책을 읽으면서 ‘언제면 나는 서울가나’,
또 ‘자라서는 외국도 가봐야지.’ 이러면서 외국 소설 책을 읽으면서 꿈을 키워서
드디어 난 대학때 서울에 왔어요. 서울 입성에 성공했고, 서울 와서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던 기자가 됐고, 또 기자가 되면서는 또
편집장이 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남자보다 한 1.5배 정도 열심히
일해서 결국 편집장이 됐어요. 이 욕심 사나워 보이는 여자가 접니다. (웃음) 10년 전 내 표정이에요. 처음에는 기자를 너무나 정말 즐겁게,
열심히, 정말 가슴뛰면서 했는데, 정치부 기자를 주로 오래 했거든요,
저는. 시사주간지이이고, 하다보니까, 한국 정치인들이 저를 너무나 골치아프게
만들어서, 한 15년 넘게 하다보니까, 분당, 창당… 그 거짓말을
받아 쓰는데도 정말 지겹고… (웃음) (박수) 나중에는 누가 막 싸워도, ‘저사람들
나중에 화해하겠지’ 이런 생각 때문에 (웃음) 취재가 잘 안돼요.
취재에 열정이 안생기더라고요. 그런데다가 제가 편집장 할 때,
고소를 너무 많이 당했어요. 권력집단을 비판하는 기사를 많이 써서. 무슨 한해에 25억의 고소를
받았어요. 한 12군데로부터… 국정원, 청와대, 검찰, 검사 12명이
한꺼번에 고소한적도 있었고, 그래서 저녁 때 자다가도 제가
현장에 가서 조사를 받은 적도 있었고, 그냥 서면으로만 진술한 적도 있었는데. 특종 경쟁하랴, 특종하면 또 고소당하랴 그래서 편집장이 되고서는
아주 더 힘들어 졌는데요. 여기 사회자분처럼 잘나가는 시절이
누가 만들어 준거예요. (웃음) 23년동안 했어요, 이 일을. 23년간
전쟁같은 특종 전쟁이라 그러잖아요, 전쟁터같은 언론사에서
전쟁터 사령관까지 마지막에 되면서, 그렇게 경치좋은 무공해 서귀포에서 숨막히는 도시 서울에 와서
30년을 살아버린 거죠. 그러다보니까 언젠가부터
너무나 몸이 힘들어지기 시작했어요. 저는 휴가도 잘 안갔던 사람이에요. 지금은 사람들
여행오라 부추기는 사람이지만, 저는 후배들 제일 싫어할 때가
휴가원 저한테 제출할 때. 왜냐하면 저자신도 휴가를 안갔으니까.
일 중독자로 살았어요. 주말에 어디 떠나면은 무슨 사건
터질까봐 불안해서 떠나지도 못하고. 그래서 후배들이 저한테 붙여준 별명이
‘왕뚜껑’ ‘마녀’ 하도 뚜껑 잘 열어서. 하도 화를 내니까…(웃음) ‘마녀’는 ‘마감녀’의 준말이에요. (웃음) 마감 조금만 늦으면
거의 뚜껑이 다 열리고 그 사람이 평생 못잊을
아주 인상적인 욕을 하는 그런… 한마디로 굉장히 재수없는 직장상사,
그게 저였는데요. 그렇게 살다보니까 남을 괴롭히니까
뒷끝이 확실히 안좋더라고요. 굉장히 몸과 마음이 다 지쳤어요. 남을 볶으려면 저는 더 볶여야 되니까
스스로. 휴식없이 살다보니까, 제가 몸이 기계가 아니다 보니까
심신이 다 망가진거죠. 병원에 갔더니 병이 없대요. 너무나
속상하더라고요. 병가라도 내야되는데. (웃음) 병 없다고 그렇게 슬픈 얼굴을 짓는
환자는 처음봤을 거예요, 의사가. 그런데 저는 죽겠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눈도 못뜨겠고, 저녁때 전철을 타고 가면서
내가 불쌍해서 막 눈물이 날 지경인데 그 중독자의 삶을 중단할 수가
없는거예요.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노는 것도 놀아본 놈이 놀고
휴가도 써본 놈이 쓰는데. (웃음) 그래서 후배가 하도 제가 힘들어
하니까 한번 내려오라고 그랬어요. 제 친구가. 제주도에, 시인인데. 그래서 저를 제주도의 비양도로
끌고 가더라고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섬인데.
제주시 한림항에서 15분이에요. 그게 천국으로 가는 15분이었어요.
딱 15분 배를 타고 들어갔는데, 너무나, 제주 본섬도
서울 사람 눈에는 천국에 가까운데, 거기는 진짜 자동차 하나 없습니다. 그 섬에서 비양봉, 오름인데,
그 오름에 올라가서, 나도 모르게 그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까 정말 눈물이 흘렀어요. 저 스스로도 모르는 의식도
못하는 사이에 눈물이 나면서, 내 안의 어린아이가
울고 있는 걸 느꼈어요. 그런데 그렇게
어린 시절에 참 근심걱정없이 그렇게 자연을 뛰놀면서 살았는데,
도시가 뭐길래, 출세가 뭐길래, 편집장이 뭐길래,
이렇게 나 자신을 위해서 단 한번의 위로할 시간도 안갖고
이렇게까지 살아야되나, ‘너 다시는 울게 하지 않을게’
제 꼬마 어린 애한테 얘기했어요. 쪼그만, 시장통에 살던 그 꼬마.
‘명숙아’ 머리쓰다듬으면서, ‘너 다시는 그렇게
너무 혹사시키지 않을께. 너를 사랑해줄께.’ 이랬는데. 그래서 제가 서울에 올라와서는
자연이 주는 치유인 에코 힐링, 그걸 정말 느꼈기 때문에,
짧은 순간이었지만… 서울에서도 자연을 애써 찾을려면
동네 뒷산도 있고 공원도 있으니까. 걷기 시작했어요.
하루에 처음에는 15분 걸었어요. 저는 ‘3보이상 승차’의 원칙에
입각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웃음) 그래서…
-기자니까 마음이 바쁘잖아요- 그랬는데 이제, ‘걷자. 나를 위해
하루에 한시간 정도는 주자’ 이래서 처음에는 15분 걷고 헉헉거렸는데,
30분, 한시간 이렇게 하면서 걷기에 점점 중독됐어요.
중독이 굉장히 많죠. 중독이 현상이 똑같은데, 중독은
‘안하면 하고싶다’, ‘하면 즐겁다’, 점점 강도가 높아지는 자극을
원한다’는 거예요. 마약중독, 도박, 심지어 우즈처럼 섹스,
그런데 저는 걷기에 중독돼 버린거죠. 그런데 좋은 중독과
나쁜 중독은 현상은 똑같은데 결과적으로 심신을 더 피폐시키느냐,
오히려 더 심신을 치유해주느냐, ‘명상’이랄지 ‘걷기’는 긍정적인 중독
이거든요. 그래서 전 중독자가 되었죠. 더 높은 강도의 자극을,
처음에는 15분에서, 한시간, 그다음 주말에 1박 2일씩 걸으러
보길도로 어디로 막 다녔는데, 휴가를 모르던 사람이
휴가를 다니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진짜 긴 휴가가 필요한
어떤 길에 꽂히고 말았어요. 그게 산티아고 길이었는데요. 거기를 너무 가고 싶었지만
제가 직장에 다니기 때문에 한 달의 휴가를 낼 수가 없어서
결국 직장을 때려쳤어요. 너무 이 길을 가고 싶어서. 그러니까 저희 어머니가
미친년이라고 한거죠. (웃음) 그래서 제 나이,
한국나이로 50 되던 해에 나 자신을 위한 선물을 주고 싶었어요.
그게 산티아고 도보여행이었는데. 저는 그 요즘 축구 있잖아요. 축구도 선수가 전후반 휴식없이 뛰면
후반전에 그라운드에서 쓰러져요. 그래서 하프타임이라는 생각하고 휴식하고
작전을 구사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데, 인생이라는 긴 게임에서는, 누가 하프타임을 대신
불러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거예요. 코치도 없고, 감독도 없으니까
자기 스스로 인생의 감독, 코치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
나는 나를 위한 휘슬을 불어야겠다. 더이상 이제는
그 가슴뛰던 기자직이 이렇게 지겨워졌는데 이걸 계속
1-2년, 2-3 년 더 하기위해서, 더 하다가 내가 직장에서, 책상에서
쓰러지던지 치명적인 병에 걸리던지 그런게 아니라도 난 더이상 우물물이
다 바닥난 것처럼 퍼내기만하고 스스로 한 번도 위로해주지 못한 채
이렇게 살기는 싫다 싶어서 오마이뉴스 국장일 때 오마이뉴스 국장이
원래 제가 2년 임기로 갔는데 제가 1년 2개월만에 그만뒀어요.
그리고는 산티아고로 떠났죠. 길이 팔백킬로에요. 한 달이 넘죠.
하루에 이십 몇킬로씩 걷더라도. 길에서, 길 끝나는 지점에서
온 세계에서 온 여행자들이랑, 저는 혼자 떠났지만
길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더 만난거는
나 자신하고 만난거예요. 처음으로 저하고
대화할 시간을 가졌어요. 너무나 사회하고 늘 대화하고
직장에서 많은 동료들하고 끊임없이 술자리에서 대화했는데
정작 나하고는 대화를 못해 본 거예요. 내가 뭘 원하는 사람인지,
내가 뭘 할 때 행복한 사람인지, 내가 앞으로 어떻게 인생을
살고 싶어하는지에 대해서 스스로하고 대화를 나눌 시간이
너무 없었던 거예요. 그걸 길에서 나눴죠. 노트북도 버리고 가고,
무거워서도 못들고 갔지만, 핸드폰도 안 갖고 가고,
mp3 조차도 안 갖고 갔어요. 모든 기계로부터 벗어나서, 길에서 소음도 자동차 경적소리도
거의 없는 그 길에서 ‘아 평화라는게 딴 게 아니구나.
소음 없는거, 기계가 없는게 평화구나’ ‘물론 기계의 좋은 점도 많지만
인간이 궁극적으로 평화스러우려면 어느 순간에는 문명의 이기를 버리는, 그런 정말 자연으로 돌아가는
시기를 가져야 되는구나.’ 저는 그 길에서 23년 직장생활,
30년 도시생활의 모든 앙금들, 사람에 대한 미움, 분노,
저를 고소했던 사람들에 대한거, 동료들, 미웠던 동료들, 예뻤던
동료들, 미련을 가졌던 직장, 이런 거에 대한 모든 걸
다 내려놓았어요. 길에서. 마치 흙탕물이 쫙 앙금이 가라앉듯이. 그러면서 비로소 자유로워지고,
비로소 저를 사랑하게 되고, 비로소 아무것도 안해도 나를
사랑할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을 했는데. 정작 그 길에서 비우고만 와도
난 좋다고 생각했는데 굉장한 새로운 소명을 얻게 됐는데 그거는 제가 전혀
예상도 못했던 일이에요. 어떤 영국 여자가
여행 33일째에 만났는데 그 여자가 ‘아 난 너무 행복했어’
-여자들이 수다스럽잖아요.- 같이 음식점에서, 그날 길에서 만나서
친해져서 식당에 갔는데 그 여자한테 ‘난 너무 세상에서
일 중독자로 살았는데 나한테 준 이 선물같은 휴가가
너무 좋았어. 나는 산티아고에
5년에 한 번씩은 올꺼야. 프리랜서로만 살거야, 앞으로는.
직장에 가면은 이런 길을 못오니까.’ 그렇게 얘기했는데,
그 여자가 딱 하는 얘기가, “우리가 받은 이 행복을
누군가한테 나눠줘야 되지 않니? 우리가 이렇게
이 길에서 행복했는데.” 그래서, ‘어떻게 나누자는 얘기야?’
그랬더니, “나라로 돌아가서 길을 만들자. 나는 영국에 가서 만들테니까 너는
네 나라 한국에 가서 만들지 그러니?” 깜짝놀라서 무슨 길을 만들어?
남이 해 놓은게 길이라는 건 지자체랄지,
도보산책로 라는 거… (웃음) 뭐 시민단체랄지 이런게 만들어야지.
넌 한 개인인데. 또 우리나라 공무원들 설득하려면,
나 그런거 못해 이렇게 생각했는데. (웃음) 그 여자가 저한테 하는 말이,
그 다음 말이 저를 열받게 한 거예요. 그렇게 좋은 말만 했으면 기자라는건 생전 자기가 안하면서
남 비평하는게 저희 직업이니까… (웃음) 할 생각을 안했을텐데, 길을
안만든다고 씹는 칼럼을 썼겠죠. (웃음) (박수) 그런데 그 여자가 하는 얘기가, ‘너네 나라는 정말 길이
어전트하게 필요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별로 좋은 소리가
아닌거 같더라고. 그래서 ‘왜?’ 그랬더니, ‘너희 나라 한국은 미친 나라야.
크레이지 컨츄리야. 그리고 너가 살고있다는 서울 거기는
테러블 시티야. 너무 끔찍했어.’ 그래서 “너 한국에 와봤니?”
그랬더니, 두 번이나 국제회의때문에 와서
장기적으로 있었는데, 한국 사람들은 정말로
정신없이 바쁘게 살고 이렇게 좁은 땅덩어리중에 어느 특정
땅덩어리에 그렇게 수많은 인구들이, 녹지대도 없이 산다는 거예요.
서울을 얘기하는거죠, 수도. 그리고 사람들이 미친듯이
바쁘게 어느 한 방향을 향해서, 사람들 사는 방식이
너무 다 똑같더라는 거예요. 자기가 왜 이 길을 걸어가는지,
왜 이 길을 뛰어가는지, 왜 이 길로 달려가는지를
생각지도 않은 채 승진, 아파트, 출세… 그러면서 저보고 하는 얘기가, “한국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때까지
경쟁하더라’ 그러는 거예요. 무덤에서부터 요람까지 복지가 아니라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
경쟁한다는 거예요.(웃음) 그 여자 얘기를 속이 아프지만
수긍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우리나라 요즘 자살율 높은거는 너무나 자기 스스로 아이덴티티를 갖고
자기가 선택한 삶을 살지않고 부모가, 이웃이, 여행도 이웃한테
자랑하기 위해서 가잖아요. 에펠탑 앞에서 사진 찍고와서
‘나 갔다왔다’. 자기를 위한 여행을 하는게 아니라
모든게 다 남한테 보여지는, 물론 요즘 젊은이들은 참 안 그런,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시도들이 있어서
조금씩 나아지곤 있지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80% 밖에 마음을 못먹었는데, 마지막에 산티아고길이
딱 끝난 다음에 선물처럼 주어지는, -산티아고 800km 걷는 동안
단 한번도 바다가 안나와요- 그런데 90킬로 떨어진 곳에 버스를
타고 가서 제가 만난게 바다였는데, 피니스테레라고,
거기서 ‘땅끝’ 이라는 뜻이죠. 우리나라 같으면 ‘땅끝마을’인데,
거기서 대서양 바다가 보이는데, 거기 어떤 그 지역의 아저씨가
저를 비경에 데리고 가더니 봉우리에서 “It’s Finisterre”
이러는 거예요. 이것이 Finisterre다. 관광객이 좀
안 가는 어떤 곳을 딱 보여주면서. 그 때, 아 한국 사람들을 위해서도
길을 만들어야 되지만, 한국의 지친 영혼들, 도시에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사람들을 위해서도 산티아고 길 같은 걸
한국에 만들어야 되지만, 제주도에 만들어야겠구나. 이런 바다 갖고서도
‘It’s Finisterre’ 이러는데 (웃음) (박수) 제가 나고 자란 그 서귀포,
그 바다, 그 외돌개 앞에서 “It’s 서귀포” 하고 세계사람들한테
얘기하고 싶었어요. 세계 사람들이 여기오면 다 감동하고
기절초풍, 놀랄게 뻔하니까. 그걸 보여줄려면, 제주의 속살을
보여 주려면 길을 내는 수 밖에 없다. 있는 길은 잇고,
끊어진 길은 다시 내고, 그 다음에 사라진 길은 불러내고
가시덤불만 다시 없애면, 길은 안 다니면 없어져 버리거든요.
그 길을 다시 불러내고. 그래서 처음에는 좀
단순무식하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한 몇 달 뒤에 고향에,
6개월뒤에 귀국하고 6개월뒤에 고향에 내려가서 2007년,
딱 3년됐어요, 지금. 2007년 여름에 이만한 때 내려가서
가을에 첫 코스를 냈습니다. 3년동안 지금 만들고 있죠. 너무나 제주도가 개발되고,
뭘 만들어야 관광객이 온다, 관광객이 점점 덜 찾는 이유가 뭔가 큰 볼거리, 카지노, 높은 빌딩,
무슨 대규모 콘도, 전시관, 이런걸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엄청나게 국민세금 써가면서. 그런데 정작 오지도 않아요. 그런데 한 사람이 갈 수 있는
길만 낼 수 있다면, 자연을 최대한 보존하면서도 한 사람,
폭 1m 미만의 길만 낼 수 있다면, 또 내지 못하는 데는 돌을 깔아서라도,
돌멩이를 그냥 걷고, 풀에는 풀길을 그냥 걷고, 바위는 바위를 걸으면서
길을 이어줄 수 있다면, 2박 3일 여행에서 제주도에
한 달도 여행할 수 있고, 그러면 여행자들은 굳이 외국까지 가서
산티아고까지 걸으러 안가도 되고, 그다음 이 관광지가 아닌 마을들도
길게 체류하는 사람들한테 식사든, 방이든 팔면서
더 한 개발에 대한, 개발하려는 이유가
마을의 소득때문이거든요. 높은 빌딩 안짓고,
큰 번듯한 건물 안지어도 제주의 자연만으로도 사람들이 와서
묵고 여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개발에 대한 유혹, 그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거다. 그거야말로 새로운 형태의 환경지키는
운동도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저희들이 내건
슬로건은 ‘안티 공구리 정신’. (웃음) 대한민국은 토목공화국이죠. 지방의회 의원도 다 건설회사 쪽들이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거기에다가 늘 주민들은
길 내달라 그러고, 우리집 확장해달라 그러고,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서, 자기
업적을 위해서 늘 뭔가 만들어요. 뚝딱뚝딱. 가보면
맨날 길을 넓히고 있고, 멀쩡하게 차가 몇 대
안다니는 길도 또 넓혀요. 예산 내서 또 넓히고. 길을 하나
내는데 50억씩 들죠, 1km에. 저희들 길 하나내는데 20km
한구간에 900만원 들여서 냅니다. 왜? 공사를 안하니까. 돈들일 없죠. 오로지 우리의 자원봉사, 노동력만
바쳐서 길을 내고 있는 중이죠. 900만원 조차도
70%는 리프렛 비용이에요. 이 자원봉사자들, TED 강의도
수많은 자원봉사자들 열의에 의해서 지식이 나눠지고 정보가 공유되듯이, 저희들은 수많은 자원봉사자의
노력으로 길이 만들어지고, 무료로 제공되고 있습니다. 입장료가 없죠, 340km의 길이. 길 만들때 특전사도,
해병대도 동원했어요. 저는… (웃음) 도지사도 이렇게 동원못하죠. 그런데 저는 특강 요청오면은
특강 공짜로 해주겠다고, 대신 길 좀 내는데 군인 보내달라고. (웃음) 굉장히 사실은 무료가 아니라
엄청 비싼 특강이 되는거죠. 특전사는 특전사 정예 요원 50명이
3박 4일 만들었고요. (웃음) 여기 해병대길은 해병대 90명이, 귀신잡는 해병이 이것도 못만드냐고
했더니 만들더라고요. (웃음) (박수) 아니 처음에는 너무나 난공사라서 돌멩이들이 무거운걸 사병들이
못옮긴다고 했는데, 하니까 하데요. (웃음) 이렇게 해서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길을 만들었는데요. 그 길을 많은 사람들,
대기업 CEO들도 왔었고, 예술가들도 왔었고, 아르바이트해서
비행기 저가항공 겨우타고 와서 텐트치고 야영하고 다니는
대학생들도 왔었고, 저는 요즘 너무 기쁜게
여름방학이 되니까, 처음에 길을 냈을때는 4,50대들이
많이 왔어요. 삶에 지친 4,50대들. 근데 20대들이 외국으로
배낭여행 가는대신에 지금 대학생들이 제주도로
다시 돌아오는, 우리 때처럼. 다시 돌아오는걸 보면서…
수학여행가서 너무 개고생하고, 막 이렇게…(웃음) 호루라기에 왔다갔다 하면서
차하고 주차장만 왔다갔다 하면서 제주도를 완전히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오해했던 우리 젊은 친구들이
제주도에 감동하면서. 그래서 산에서, 들에서, 바다에서
이렇게. 너무 예쁘죠. 자신을 자연속에 내려놓고 소통하면서,
도시에서 얻었던 상처들, 경쟁에서 너무 지친 심신들을
이 길에서는 경쟁이 없으니까. 자연이, 제주도의
자연은 굉장히 여성적이에요. 여성적인 에너지로 이 자연을… 드라마틱하고 그랜드 캐년처럼 넓고
크고 높은 자연은 보면 주눅이 들어요. 처음엔 멋지지만.
그리고 약간 압도감이 들고. 그런데 제주 자연은
제일 높아야 한라산 1950m. 그 한라산도 섬 전체를 이렇게 싸안듯
할머니가 이렇게 안아주듯이. 그래서 그 제주도의 길에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잃고 온 어머니도 있었고,
아들이 교통사고 당해서. 너무 오고 싶었지만 아들이 죽은 후에
온 엄마도 있었어요. 그런 엄마. 그리고 제 동생이 사실은
우리사회에서 지탄받는 ‘친구’의 주인공같은
조직폭력 출신이에요. 두목 출신이에요, 제 친동생이. 누나는 기자를 했는데 동생은 제주도에서
제일 유명한 조폭이다 보니까 (웃음) 저는 정말 걔가 싫었어요. 무슨 조폭사건 터질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그랬는데 그 친구가
내려갔을때 처음으로, 제가 돈도 뭐도 없이 내려가서,
또 제주도를 떠난지 32년만에, 거의 이방인이 돼서 내려갔는데
이 친구가 저한테 차도 내주고, 같이 탐사도 하고,
온갖 길을 같이 걸으면서 제주도에 얽힌 많은 얘기들을 들려주고
전설들을. 좀 지적인 조폭인거죠. (웃음) 그래 갖고. 이친구에요. 지금
이 가수 조덕배씨를 업고 있는. 참 나는 그 동생과도 길을 통해서
다시 만났고, 화해했어요. ‘이 친구가 원래 바탕은 굉장히
순수한 소년같은 데가 있구나. 어떻게 사춘기 때 한 번 엇나가기
시작해서 그렇게 됐던 거구나, 우리 사회가 그렇게 만든 부분도
있구나’ 생각하고 이 친구랑 비로소 소통했고,
그런 식으로 길을 걸으면서 자기 가족하고
소통하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17살짜리 게임 중독에 걸린, 학교에서 말썽만 피우는 아들을
어떤 아버지가 데리고 왔는데, 일주일동안 같이 걸었는데
학교 가봤자 공부 안할거니까 현장학습으로 해서 데리고 왔던데,
저를 길에서 만났어요. 그런데 저한테 너무 고맙다고 해서
왜 그렇게 고맙냐고 했더니 이 아들하고 너무나 얘기가 안통하고
얘기할려면 싸움이 됐는데, 이 길에서 같이 걸으면서 진짜
서바이벌을 하기 위해서 동지가 됐다. 그리고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됐다. 그러면서 17년동안 나눈 얘기보다
일주일동안 나눈 얘기가 더 많았다고. 가슴을 열면 그렇게 되는 거거든요. 집에서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패턴으로 얘기하다보면 서로 5분안에 엇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꼭 제주도를 안오시더라도, 여러분들한테 필요한 것은 제가 볼 때는 튼튼한 운동화 그리고 여러분 자신한테
선물처럼 줄 수 있는 몇 일의 휴가, 그것만 있으면
여러분 자신을 만날 수 있고, 그게 꼭 올레길이 아니어도 돼요.
제주도가 아니어도, 근처 가까운 데라도 자연에서, 인간의 모태인 고향인
자연을 많이 접하시길 바라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하고
만나시길 바랍니다. 자기 자신을 모르는 경우가 제일 많고, 자기 자신하고 대화할 시간이 가장
짧은 게 현대인이고 한국사람 이니까요. 여기 계신 외국 분들도
언제 제주올레 한번 오시고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여성적인,
가장 평화로운 길이라고 자부합니다. 자원봉사자가 만드는 길이에요.
여러분, 감사합니다. (박수)

2 thoughts on “Jeju Olleh: Myung-Sook Seo at TEDxSeoul

  1. 일섭나무 Post author

    자원봉사자가 만든 제주올레길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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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최은주 Post author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수고 많으셨어요
    제주 올레길을 꼭 걷고 싶네요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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